
김약국의 딸들
저자 : 박경리
출판사 : 나남출판
|
첫머리의 작품 배경으로 통영이라는 작지만, 거친 뱃사람의 풋풋한 삶의 내음가 결코 퇴폐적인 냄새가 풍기지 않는 자본주의가 묻어나는 어촌항이 와 닿았다. 그리고 진행과정에서 묻어나오는 사투리에 적잖게 놀랐고 정이 갔다. 생활 속에서 흔히 쓰는 말인데도, 글로 보는 말은 색다르고 더 투박스러웠다. 또,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라고 믿어온 나는 등장 인물에 미리 상당한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성급하게 이란화해서 믿어 온 탓인지 간단히 살인을 저지르는 관약국 봉제의 동생, 봉룡의 포악함 앞에서 나의 그 호감은 무참히 깨어지기 시작했다. 아내를 찾아온 남자를 살해하고, 아내를 죄인으로 몰아 비상을 먹게 만들고, 봉룡은 달아났다. 그의 아들 성수는 비상을 먹고 죽은 이의 자손은 번창하지 않는다는 말과 부모를 닮은 성수의 외모에서 느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큰어머니의 미움을 받았다. 성수는 성장기 내내 사촌 누이에의 연정을 가졌으나 누이의 죽음으로 상처받고 나약한 선비가 됐다.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으나 돌림병으로 죽고 그 후 그의 아내 한실댁은 딸만 다섯을 낳았다. 한실댁은 후덕하고 인자한 여인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딸들을 뒷바라지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걸고 딸들의 액운조차 자신이 짊어지기를 빈다. 그녀의 그 사랑은 관대하고 희생적이었으나 지나치게 맹목적이었기에 그 모든 기대와 달리 딸들은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갔다. 용숙은 과부가 되었으며 영아 살해 혐의로 경찰서를 다녀왔고, 용빈은 노처녀, 용란은 집에서 키운 머슴 한돌이를 사랑했다. 그 흉으로 인해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으나 한실댁과 한돌이를 그 남편의 도끼날 아래 목숨을 잃게 하고 자신은 미쳐버린다. 용옥은 서기두의 아내가 되었으나 기두는 용란에게 정을 기울이고 용옥에게는 냉정했다. 집안의 궂은 일을 맡아 하며 힘겹게 살던 용옥은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여 목숨을 잃는다. 이런 중에 김약국 가세는 날로 기울어 몰락하고 김약국 자신도 병들어 죽는다. 결국 아직 어린 막내딸은 고아가 된다. 의식적으로 어머니를 배신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약국의 딸들은 모두 어머니의 기대를 어기고 불행해지고 말았다. 왜?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 중에서 한실댁은 딸들의 거듭되는 불행과 그로 인한, 그 보다 몇 갑절이나 더 되는 자신의 고통을 운명이며 전생의 죄갚음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딸들 각자의 개성 때문으로 받아들였다. 운명이라고 부르기에는 각각의 상황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너무나도 능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거의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각자의 기질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갈 길을 만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들 중에서도 용숙과 용란의 기질은 차라리 운명이라며 덮어 버리고 싶을 만큼 점잖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풍족한 속에서 자란 이가 보여주는 그 특유의 자신감을 오만과 뻔뻔스러움으로 바꾸어 보여 주고 있었다. 특히 용란이 가졌던 비윤리적인 개성은 환경에 크게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능동적이었으며 가족과 자신,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 용란이 밟고 간지로 동정이 가기도 했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감정적 사랑보다 육체적 쾌락에만 매달리는 용란에 대해 끓어오르는 환멸 때문에 나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용숙 역시 윤리적으로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개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한 것은 그렇다 손치더라도 그 시대가 요구하는 희생과 정절이 따라야 하는 사랑에는 그녀 스스로 부응하지 않았고 추잡하고 소란스러운 화제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도한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받는 것으로 인해 더 자극을 받아서인지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고 집안이 망해 돈을 빌리러 온 어머니를 냉대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용숙의 그러한 행동은 개성적인 측면이 아니라 그릇된 인격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의 가장 고귀한 부분을 포기하였으므로, 용숙이 돈을 벌었어도 불행하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게 또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적 조차 없는 김약국, 글 김약국의 가세는 몰락하고야 마는가? 어쩌면 그것은 김약국의 선비와 같은 그 파초와 같은 성품 때문이지도 모르지만, 나는 감히 그 이유를 이 소설에서는 사회적인 정의가 별반 존재하지 않기 대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언제, 어느 곳에나 분명 있다고 믿어왔던 것을 나는 찾지 못했다. 집안을 온 통영 바닥의 웃음거리로 만든 영악한 용숙은 돈을 벌어 나날이 번성하였고, 약삭 빠른 친일파 정국주의 재산은 날이 다르게 불어났다. 김약국이 큰돈을 들여가며 시작했던 모구리 어장도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실패하고 연이은 흉어로 어장은 망하고, 많던 재산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딸들과 남편에게 헌신해 온 한실댁은 사위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박복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용옥은 시아버지에게 겁탈 당할 뻔하고 남편을 찾으러 갔다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는데, 이로써 시아버지의 허물은 영원히 묻혀진다. 또한 그 시대적 배경 역시 일제 강점기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동물적인 생리가 있을 뿐이다. 작가는 민족 모두가 핍박받던, 정의를 찾아보기 힘들던 때의 주인공 일가의 몰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용빈이라는 지적이고 현명한 여성을 다른 형제들과 같이 극한적인 불행에 빠뜨리지 않음으로써 인간과 숨겨진 정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통영이라는 작은 도시 속에서의 삶을 통해 보여 주는 그 시대 우리 민족의 흥망성쇠는 그 숨겨진 정의만큼이나 가슴 뻐근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